뷰페이지

[문화마당] 이문세의 무대/강태규 대중음악 평론가

[문화마당] 이문세의 무대/강태규 대중음악 평론가

입력 2013-03-14 00:00
업데이트 2013-03-14 00:24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이미지 확대
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지난 7년 동안 이문세의 무대는 막을 내리지 않았다. 총 648회의 콘서트, 누적 관객 82만명.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뮤지션이다. 2005년 이전 기록은 집계되지 않았으니 어림잡아 100만 관객이 그의 공연을 보았을 것이다. 그의 골수 팬이 아니더라도 공연 내내 아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광화문 연가’로 시작해 ‘붉은 노을’로, 혹은 ‘옛사랑’으로 시작해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로 여운을 맺는 그의 공연에는 세월의 숨결이 담겨 있다. 추억을 끄집어내 되씹는 시간의 연속이다. 2시간의 공연은 촌철살인의 무대다. 그때의 기억, 그 순간의 사람, 심지어는 그 찰나의 냄새까지도 떠오르게 한다. 세월을 버티는 노래의 감동은 잔잔한 격정을 불러일으킨다.

필자는 1996년 당시 이문세 공연 ‘짝짝이 신발’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성장한 사람에게는 경이로운 무대였다. 뮤지컬 형식이 가미된 공연이었는데 기존 가수들의 무대와는 판이했다. 연출, 음향, 조명이 일체를 이룬 차별화된 무대였다. 훗날 그 공연에 대해 물었더니 당시 각계 정상의 스태프들이 모여 만든 무대였다고 한다. 그의 노래를 놓고 준비된 각본 속에서 무대는 관객과 밀고 당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문세의 무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진화해 오고 있었다. 관객을 결코 방치하지 않는 무대 위에 집념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공연 진화의 원동력에는 이문세의 세심함을 빼놓을 수 없다. 관객 입장에서 잠시도 자신을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공연 스태프들은 기대 이상의 요구에 부합하는 데 이제 이골이 났다고 할 만큼 공연에 있어서 관대하지 않다.

어느덧 이문세는 가수 데뷔 30년을 맞았다. 그동안 방송 진행자로도 명성을 날려온 이문세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뮤지션이다. 이문세의 음악 행보는 대한민국 가요사에서 결코 누락될 수 없는 역사로 각인된다. 1987년 발표한 4집 앨범은 1980년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힐 만큼 존재감을 갖는다. ‘사랑이 지나가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이별이야기’ ‘가을이 오면’ 등 수록곡 전곡이 히트하며 285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4집 앨범은 당시 사상 최다 음반 판매 기록을 뒤엎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가수에게 히트곡 한 곡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자부심이 되고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는 달리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하물며 하나의 공연을 오롯이 히트곡으로 채울 수 있는 뮤지션은 한 손에 꼽힌다. 이문세의 레퍼토리는 이미 국민가요다. 이문세는 공연 내내 관객에게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그때 그 순간을 떠오르게 하는, 히트곡으로 시작해 히트곡으로 마감하는 독보적인 뮤지션이다. 30년의 세월을 버티며 국민들에게 사랑받았으며, 현존하는 후배 뮤지션들에게 교과서 같은 힘으로 각인되었다. 그의 히트곡이 임재범, 이승철 등 당대의 뮤지션들과 빅뱅 등 아이돌 가수들을 통해 리메이크되며 세대를 넘어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것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오는 6월 1일 이문세는 가수 데뷔 30주년을 맞아 올림픽 주경기장 무대에 오른다. ‘대한민국 이문세’라는 타이틀이 결코 거창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 같은 그의 음악 족적 때문이다. 5만 관객과 조우할 무대는 또 어떤 그림으로 채울까? 세월을 따라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는 그의 노래, 그의 무대가 뇌리에서 꿈틀거린다.

2013-03-14 30면

많이 본 뉴스

의료공백 해법, 지금 선택은?
심각한 의료공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와 정책 백지화를 요구하는 의료계가 ‘강대강’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적 협의체를 만들어 대화를 시작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유예하고 대화한다
정부가 전공의 처벌 절차부터 중단한다
의료계가 사직을 유예하고 대화에 나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