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신춘문예 詩당선작 ‘정말 먼 곳’ 영화로 만든 박근영 감독

영화 ‘정말 먼 곳’의 박근영 감독 <br>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는 말보다 이미지로 감흥을 주는 순간이 있어 시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국문학도로서 시에서 받은 영감을 충실하게 영화에 담아 보고 싶기도 했고요.”

●대학동기 박은지 시인 등단작서 영감

최근 화상으로 만난 박근영 감독은 영화 ‘정말 먼 곳’의 모티브를 시에서 찾은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는 많아도, ‘동명 시’라는 말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 ‘정말 먼 곳’은 우선 신선하다.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정말 먼 곳’을 시나리오에 담았으니.

박 감독은 “화천의 풍경을 보고 영화를 구상했고, 거리감을 주제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대학 동기인 박은지 시인의 등단작이 영화 속 상황과 비슷하다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화천에 터 잡은 성소수자··유사 가족의 삶

지난 18일 개봉한 영화는 강원 화천에 자리 잡은 한 유사 가족의 삶을 그렸다. 서울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지친 진우(강길우 분)는 딸처럼 여기는 조카 설이와 터전을 옮겼다. 양떼 목장에서 일하는 진우의 삶이 안정될 즈음, 그의 연인인 시인 현민(홍경 분)이 화천으로 이주하고, 설이 생모인 여동생 은영(이상희 분)이 갑작스레 찾아오면서 일상에 큰 파장이 온다.

박 감독은 “영화가 소외되거나 각자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우화처럼 읽히길 바랐고, 성 소수자와 사회와의 거리감, 개인과 사회와의 거리감, 우리 삶 속의 거리감을 녹여 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안식처 꿈꾸는 이들의 절실함, 詩로 녹여

극 중 현민이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라고 시 ‘정말 먼 곳’을 낭송하는 장면은 안식처를 찾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들의 절실함을 녹였다. 박 시인은 “애초 제가 생각했던 정말 먼 곳은 아예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이지만 영화는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 함께 꿈꾸는 것, 삶의 이어짐을 잘 보여 줬다”고 했다.

●한 달간 24시간 대기하며 양 출산 장면 찍어

‘정말 먼 곳’은 자연의 경이로운 순간을 담아야 했기에 촬영하는 데 인내가 필요했다. 박 감독은 “양이 출산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한 달가량 순번을 정해 24시간 대기한 끝에 촬영할 수 있었다”며 “양이 갖는 신화적 의미와 결부해 절망과 희망의 순환이 우리 삶에서 끊임없이 이뤄진다고 생각했다”고 벅찬 순간을 회상했다.

박 감독은 “중학생 시절 이와이 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1995)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설경을 보고 감동을 느껴 감독을 꿈꿔 왔다”며 “앞으로도 개인이나 공동체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정말 먼 곳(박은지)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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