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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일감독 “드러날 듯 말듯한 아픔에 더 큰 울림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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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핑크’ 27일 개봉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 전수일(52). 영화철학자로 불리는 그가 신작 ‘핑크’(27일 개봉)로 돌아왔다. ‘핑크’는 가족에 의해 파괴된 삶을 살던 여자가 ‘핑크’라는 선술집에 살게 되면서 자기 방식대로 버텨내고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수작이다. 지난 21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 사옥에서 전 감독을 만났다.


▲ 국내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꼽히는 전수일 감독은 “한 여성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핑크’는 공간과 리듬, 소리 등이 어우러진 영상시에 가깝다.”고 말했다.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핑크’라는 발랄한 제목과 달리 영화가 전반적으로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다.

-원래는 한 여자가 남도를 전전하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우연히 군산 쪽에서 ‘핑크’의 배경이 되는 해운 노조 사무실을 발견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곳이지만, 공간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주변의 회색 갯벌과 산동네 분위기도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격이었다. 영화는 아픔과 상처의 정서를 쭉 따라가면서 공간과 리듬, 소리 등이 어우러진 영상시에 가깝다.


→영화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 당했던 성폭력 기억 때문에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수진(이승연)이 ‘핑크’에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래는 역사의 상처로 인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가족의 상처로 바꿨다. 수진은 본인의 상처와 억압을 스스로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이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근친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조바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30대에 들어서 어린아이처럼 퇴행적인 증세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픔이 치유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문제와 결부시키기보다는 아픔을 지닌 수진이 ‘핑크’라는 공간과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수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선술집 ‘핑크’의 여주인 옥련(서갑숙)이다. 수진과 대조적인 캐릭터로 극의 또 다른 중심축인데.

-옥련은 자신이 사는 산동네가 철거 대상이 되자 고장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요구도 하고 공권력에 맞서 투쟁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물론 옥련은 사회적 권력 앞에 나약한 소시민의 체념을 대변하고 있지만, 수진은 자기 의지가 강한 옥련의 모습을 보고 조금씩 닮아가면서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치유하게 된다.

→11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서갑숙의 전라 노출신 등이 화제다. 상당히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섹슈얼리티를 강조하기보다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자 했다. 옥련이 산동네 사람들의 삶에 잘 녹아들게끔 하는 장면이었다. 서갑숙씨도 노출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영화에 필요한 부분이라는 데 생각이 일치해 오히려 자유로웠다. 해외 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는데, 서갑숙씨가 내 영화에 관심이 많아 출연하게 됐다.


→자유로운 방랑객 역으로 가수 강산에가 등장한다.

-원래는 음악감독만 맡으려고 하다가 출연까지 하게 됐다. 방랑객은 음악으로 인물의 아픔을 달래주는 인물이다. 생생함을 주기 위해 강산에씨가 직접 노래하는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사람들의 아픔을 관조하고, 바라보는 제3의 눈이다. 다시 말해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

→인물들의 연기가 과장되지 않고 상당히 사실적이다.

-감정을 내면에 억누르고 오히려 겉으로 드러날 듯 말듯 하는 연기가 더 울림이 있다고 본다. 희로애락은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 아픔을 감추는 것이 더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것을 표현할 때 연기를 하려고 하거나 뭔가 해 보려고 하는 배우들이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정을 폭발하기보다는 억누르면서 마치 연기가 아닌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도록 주문했다.

→롱테이크(길게 찍기)가 자주 쓰이고, 미장센(화면구도)이 강조돼 마치 사진첩을 보는 것 같다.

-빛에 대한 컨트롤을 많이 했다. 조명을 쓰기보다는 은은한 역광을 사용해 인물과 공간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했다. 대신 조명의 색감은 자제해 영화가 전반적으로 무채색에 가깝게 표현되도록 했다. 음악도 과장된 것을 자제했다. 평소에 사진과 그림을 좋아하고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혹자는 내 영화가 너무 미적으로 흐른다고 말하지만, 나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간도 하나의 이미지라고 보기 때문에 공간을 파헤치고 해부하면서 해석하는 것이다.

→영화 제목인 ‘핑크’가 의미하는 바는.

-핑크라는 색은 화려함을 갖고 있지만, 빛바랜 핑크는 우수, 상실 등의 가치가 공존한다. 흔히 여성들의 꿈을 ‘핑크빛’이라고 많이 표현하는데 상처라는 양면성도 담고 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데 아쉽지 않나.

-영화제용 영화를 만들었다기보다는 보편적인 정서에 나의 색깔을 얹었다. 해외에서는 작가로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공간을 해석한 것에 대해 평가를 해주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 충무로에는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비슷한 유형, 비슷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영화를 표현 매체로 본다면 사회의 한 모습이나 삶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고 세계관을 투영한 것인데, 재미를 위한 액션이나 과장된 멜로로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등 너무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점이 아쉽다.

→구상 중인 작품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로드무비를 좋아한다. 다음 작품은 사랑에 관한 멜로드라마다. 남미 페루에서 작업을 하게 될 것 같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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