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원더키디] <3> 영화제 35관왕 ‘벌새’ 김보라 감독

김보라 감독은 “여성들을 향한 유리천장, 그 힘든 허들을 뚫고 나온 웰메이드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상업영화, 심지어 못 만든 영화까지 다양한 여성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br>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원더키디’ 방영 30년 후 상영된 이 영화에서 주인공 ‘키디’는 소년이 아닌 소녀다. 우주 탐사선의 선장이었던 ‘원더’한 아버지 대신 서울 대치동의 미도상가에서 떡방앗간을 하는 현실의 아버지가 있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35관왕에 등극한 영화 ‘벌새’의 김보라(39) 감독이 직조한 1994년의 한국이다.
영화 ‘벌새’에서 14살 중학생 은희 역을 맡은 배우 박지후.<br>엣나인필름 제공
첫 장편 입봉에 거둔 놀라운 성과. 소감이 어떨까. 새해 벽두,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영화 관련 행사에 불려 다니느라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볼 새가 없었다고 했다.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아서 감사했고요. 주변에서 되게 좋아하셨어요. 오래 뭘 하던 사람이 잘되면 기쁜가 봐요.”

이 원더한 키디의 탄생에 지인들이 더욱 감격한 까닭은 그의 오랜 노력을 알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구상을 하던 2012년부터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6년, 독립영화치고도 긴 기간이었다. 더욱 완벽해야 상영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쳤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구성 단계에서 절반가량 틀어지니까요. 학교(동국대 영화영상학과) 다닐 때 재능 있던 여성 감독들이 데뷔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봤고요. 영화판이라는 게 남성 중심이라 여성 롤모델이 없고, 창작자로서 자기 검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시간이 더욱 오래 걸렸어요.”

‘벌새’는 15세 소녀 은희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폭력들을 미세하게 포착, 14만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다. 성적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날라리’를 적어 내라는 학교, 집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오빠의 폭력, 사랑하는 이를 앗아 가는 성수대교 참사 등이다.

최근에 김 감독을 놀라게 하는 것은 “중년의 남성 의사가 은희를 진찰할 때 아이를 강간할까 봐 불안했다”는 후기들이다. “여태까지 한국 영화에서 얼마나 강간 신이 자주 재현됐으면 그런 공포를 주는지 충격을 받았어요. 여성 관객들이 마음 편히 영화조차 못 봤겠다 싶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영화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김 감독 생각에 그런 신들은 윤리적 문제와 함께, 적지 않은 영화에서 똑같은 장면을 반복재생한다는 점에서 미학적으로도 ‘직무태만’이다.

은희부터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 은희의 엄마에 이르기까지 세필로 그린 듯한 ‘벌새’의 여성 서사는, 그가 20대 초반 페미니즘 공동체에서 생활한 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에서 남성은 무조건적인 악, 화해할 수 없는 적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일견 가해자로 보이는 남성들조차도 사랑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뒤틀린 권력을 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거든요.” ‘벌새’에서 가족들 위에 군림하던 아빠가 딸의 수술 소식에는 오열하고, 의사는 오빠의 폭력에 고막이 찢어진 은희에게 ‘진단서 끊어줄까?’ 묻는다.

새내기 감독에게 배우와 스태프들이 감독의 OK 사인 하나만 바라보는 촬영 현장은 아직도 버겁지만, 몇 프레임 차이로 뉘앙스가 바뀌는 편집의 리듬은 조금씩 체화하는 중이다. 직업적 굴레였던 여성이라는 정체성도, 지금은 축복으로 여긴다.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건 분명 힘들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장이 열린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팔짱 끼고 구경하지 않게 되는 거죠. 관객들이 영화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목소리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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