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광주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를 잃은 유가족들이 뭉쳐 연희동 ‘그사람’을 단죄하는 영화 ‘26년’(작은 사진)에 한혜진(31)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사람들은 또 놀랐다. 물론, 그는 ‘예쁜 척하는’ 역할을 맡은 적은 없었다. ‘굳세어라 금순아’에선 과부였고, ‘가시나무새’에선 고아에 미혼모였다. ‘제중원’에선 백정 출신과 사랑에 빠졌고, ‘주몽’의 소서노 역시 운명을 개척하는 능동적 캐릭터였다. “아픔이 있는 캐릭터에 묘하게 끌린다.”고 했다.
그래도 ‘26년’은 달랐다. 자칫 의식 있는(?) 배우로 낙인 찍히면 잃을 게 더 많다. 토크쇼 ‘힐링캠프’ 공동진행자로, 광고 모델로 잘나가고 있는 그가 민감한 소재 탓에 제작이 불투명한 영화에 왜 출연을 결심했을까. “2008년 (김)아중이랑 류승범 선배가 캐스팅됐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무산됐더라고요. 올 초에도 투자가 잘 안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다 진구씨가 캐스팅됐고, 여배우는 미정이란 기사를 봤죠. 나한테 왜 연락이 안 올까란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들었어요. 낮잠에서 깨니 전화가 왔어요. ‘26년’ 시나리오가 들어왔다고. 소름이 쫙 끼치던걸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가슴이 뜨거웠어요. 평생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죠. 조급했어요. 못 하게 될까 봐. 회사에서 시나리오를 건네주긴 했지만 정치적인 것에 연루되고 오해를 살까 봐 걱정된다고 만류했어요. ‘CF 안 해도 되냐’고도 했죠. 그래서 안 해도 된다고 했어요.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안 무섭다고. 하하하.”
그는 1980년 광주를 겪지 못한 세대다. 캐스팅이 확정되고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오월애’ 등 다큐멘터리와 ‘PD수첩’ 등 시사다큐를 찾아서 봤다. “솔직히 무지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에야 자료를 찾아봤다. 너무 끔찍했다. 관련자료를 보는 내내 분노가 끓어올랐다.”고 했다.

4㎏이 넘는 개량 M16 소총을 분신처럼 다뤄야 하는 터라 크랭크인 전부터 사격훈련을 받았다. 조준과 격발 자세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는 “총에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5분을 버티고, 또 10분을 버티는 훈련을 했다. 덕분에 승모근이랑 팔 근육은 지금도 남아 있다.”며 웃었다. 장면 대부분을 스턴트맨 도움 없이 직접 소화했다. 도로 한복판에서 ‘그 사람’이 탄 차량을 저격하려다가 총이 과열돼 폭발하는 장면을 찍을 땐 아찔했다. “스턴트맨이 할 줄 알았는데 감독님이 직접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용증명 보낼 거예요’라고 흘겨보고는 제가 찍었죠. 나중에 액션배우 할까요. 하하하.”
‘26년’은 그에게 평생 남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80년 광주만 아니었다면 건강하고 밝게 자랐을 미진에게는 슬픔과 함께 당차고 밝은 기운이 공존해야 했다. 혜진씨에게 그 느낌이 있었다.”는 제작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 말처럼, 한혜진은 더도 덜도 말고 미진이었다.
그는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읽히기를 바랐을까. “잊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다시는 이런 일 있으면 안 되잖아요. 여태껏 살기 바빠서 관심 밖이었던 게 내내 죄송했어요. ‘살아도 살 수 없는 삶인 걸 아시잖아요’란 주안(배수빈)의 대사처럼 아직도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세요. 세월이 흘러 잊히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울까요. 젊은 세대들도 그날을 알아야죠.”
한혜진은 지난달 2일 부친상을 당했다.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할 텐데 ‘힐링캠프’ 녹화와 ‘26년’의 지방 인사, 인터뷰까지 강행군이다. “차라리 다행이에요. 짬이 나면 슬픔이 주체가 안 되는걸요. 아빠한테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죠. 막내딸이 하는 일이면 뭐든 기뻐하셨던 분이에요. 배우가 될 때도 그랬고, ‘26년’을 선택하고서도 가장 많이 응원을 해주셨어요. 담양에서 자랐고, 전남대를 나오셨어요. 보셨다면 자랑스러워하셨을 텐데….”
어느덧 데뷔 11년차다. 나이란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 한혜진은 “여배우는 역시 서른부터”라며 웃었다. “20대에는 ‘주몽’처럼 대박이 나도 기쁜 줄을 몰랐다. ‘더 높이, 더 높이’ 위치에 대한 욕심만 냈다. 서른을 넘어서면서 여유도 생기고 기쁨도 누릴 수 있게 됐다. 예능이든 드라마나 영화, 강연이든 경험을 쌓고 싶다. 물론, 인기 욕심은 버렸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고 덧붙였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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