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감독은 2009년 단편영화 ‘오감도’ 촬영 당시 편집하고 남겨뒀던 부분을 다시 덧붙여 장편영화로 완성했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미스터리 멜로 정도가 되겠지만 영화는 실험적인 요소와 다층적인 구성이 맞물려 색다른 느낌을 준다.
영화는 인물 간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이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연극연출가 재인(황정민)은 새로운 작품을 쓰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치자 영감을 얻기 위해 아내의 후배 나루(김효진)와 도발적인 사랑에 빠진다. 남편의 배신과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정하(엄정화)는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나루를 다시 만나면서 혼란에 빠져든다.
이 영화는 충무로에서 오랜만에 여배우들이 전면에 나서는 영화다. 후반부로 갈수록 정하와 나루의 묘한 관계가 긴장감을 주면서 극의 중심을 이끌어간다. 단편영화에서 이미지의 나열로 다소 파편화된 느낌을 줬던 민 감독은 기승전결이 있는 한 편의 영화로 완결성이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편하게 볼 수 있는 매끈한 영화는 아니다. 시간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진행되는 플래시 포워드 구조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재인이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빌어 전개되는 액자식 구성과 죽은 남편이 등장하는 상상 속 장면도 색다르다. 특히 가학적-피학적 이미지와 동성애 장면 등 파격 멜로는 강한 긴장감을 준다. 이에 대해 민 감독은 영화를 “현실과 환상, 과거가 하나로 뭉쳐지면서 여러 결들을 읽어낼 수 있다. 압축적이고 짧다는 점에서 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끝과 시작’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등 특히 멜로물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섬세한 연출력을 선보였던 감독의 실험적인 도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전작처럼 매끈하고 세련된 작품을 기대한 관객들은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우들의 호연은 눈길을 끈다. 엄정화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 아내 역을 섬세하게 표현했고 파격적인 사랑에 휩싸이는 재인 역의 황정민도 색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이 둘은 이후에 영화 ‘댄싱퀸’에서 다시 호흡을 맞췄다. 김효진은 영화 전반의 신비롭고 모호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4일 개봉.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