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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장르로 뿌리내린 ‘직장 드라마’ 인기 비결은

한 외국계 회사의 과장인 김지희(35)씨는 요즘 드라마 ‘직장의 신’을 챙겨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에는 TV가 없지만 매주 인터넷으로 이 드라마는 꼭 다운받아서 챙겨 본다. 김씨는 “예전에 취직을 못해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조직 안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조금은 해소할 수도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다른 드라마보다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직장인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직장 드라마’(직드)가 드라마의 한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 점점 심해지는 생존 경쟁 속에서 취업난, 퇴직, 조직의 줄서기 문화 등 직장 문화를 블랙 코미디 형태로 그리는 직드의 인기 배경은 간단하다. 직장인 시청자의 ‘100% 공감’을 밑천으로 그때그때 사회상을 민첩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직장 드라마’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KBS ‘직장의 신’, KBS ‘동안미녀’, SBS ‘샐러리맨 초한지’, tvN ‘막돼먹은 영애씨’, MBC ‘신입사원’.<br>MBC, KBS, SBS, tvN 제공
21일 종영하는 KBS 월화 드라마 ‘직장의 신’의 평균 시청률은 12~13%. 수치상 ‘대박’은 아니었지만 방영 기간 내내 화제를 몰고 다녔다. 슈퍼갑 계약직 사원 미스 김(김혜수)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억눌린 조직 문화 속에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직장인의 입장을 속시원히 대변했다.

극중 미스 김은 업무 능력도 완벽하지만 미용사, 병아리 감별사, 조산사 자격증 등 무려 124개의 자격증을 보유해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해결사로 나선다. 하지만 스스로 조직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계약에 규정된 업무가 아니면 과감히 거부하고 오후 6시면 조금도 눈치보지 않고 ‘칼퇴근’하는 미스 김은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주는 캐릭터였다.

물론 미스 김의 캐릭터가 다소 과장되고 희화화된 면모도 컸다.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자르고 탬버린을 흔들 때도 완벽을 기하고 업무 외 수당을 당당하게 청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판타지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이 땅에서 비정규직 또는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애환을 비중 있게 그리면서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강렬했다.

최근 ‘갑을 관계’의 횡포가 사회적 문제로 잇따라 대두되면서 드라마는 더욱 힘을 얻었다. 대기업 임원의 승무원과 호텔 도어맨 폭행 사건,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사태 등 이른바 ‘갑의 횡포’ 속에서 일터의 약자인 비정규직을 정면으로 그린 드라마는 화제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원작으로 했지만 88만원 세대로 대변되는 계약직 정주리(정유미), 회사의 퇴직 압박에 몰린 고 과장(김기천) 등 국내 직장 풍속도로 요령껏 변환한 것도 인기 요인이었다.

물론 그 한가운데는 미스 김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 김혜수의 연기력이 자리한다. 대본을 받고서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출연 의사를 밝혔다는 김혜수는 “미스 김을 매사에 완벽한 인물로 그리고 싶었고, 내가 미스 김 자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일찍부터 자신감을 보였었다.

따져 보면 우리 드라마에도 ‘직드’는 꾸준히 있었다. 한국형 직드의 원조는 뭐니 뭐니 해도 1987~1993년 방송된 KBS ‘TV 손자병법’. ‘만년과장’ 이장수(오현경)를 중심으로 중국의 고전 ‘삼국지’에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캐릭터를 따온 유비, 관우, 장비, 여포 등의 부하 직원들을 통해 직장인의 애환과 처세술을 두루 담았다.

2000년대에 진입해서는 취업난과 함께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직드가 주류를 이뤘다. 2005년 MBC 드라마 ´신입사원´은 스펙이 취업의 열쇠로 작용하는 세태를 풍자한 화제작이었다.

30대 골드미스, 워킹맘 등 여성 직장인의 일과 사랑을 다룬 작품도 많았다. KBS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 SBS ‘달콤한 나의 도시’(2008)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2007년 ‘골드미스’가 유행어가 되던 시절 선보인 tvN ´막돼먹은 영애씨´는 뚱뚱하고 이름만 예쁜 ‘이영애’가 직장에서 겪는 사랑과 승진, 상사와의 관계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 인기를 끌었다.

워킹맘의 고충과 사내 정치의 이면을 보여준 MBC ‘역전의 여왕’(2010), 스펙을 중시하는 사회상을 풍자한 KBS ‘동안미녀’(2011), 직장의 약육강식 역학구도를 보여준 SBS ‘샐러리맨 초한지’(2012) 등도 직드 계보를 잇는 주요작들이다.

방송 전문가들은 직드는 앞으로도 꾸준히 세를 얻어 갈 ‘현실 밀착형’ 장르라고 입을 모은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은 현실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투영된 판타지를 보고 싶어한다”면서 “일상을 뒤집은 색다른 접근 방식이 발랄한 캐릭터와 연결된다면 쉽게 폭발력을 발휘할 장르”라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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