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도 넘기지 못한 채 제작비도 못 건진 영화들이 허다하다. 2011년 ‘완득이’, 2012년 ‘늑대소년’ 등이 같은 기간 비수기에도 불구하고 500만~800만을 동원했던 것과 달리 저조한 성적표다. 이것이 호황 뒤에 찾아오는 질적 하락인지, 1보 전진을 위한 숨고르기인지 업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지난 10월 개봉한 ‘깡철이’는 충무로의 블루칩 유아인이 주연해 화제를 모았으나 120만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천정명·김민정 주연의 ‘밤의 여왕’은 25만명이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배우 출신 감독인 하정우와 박중훈이 메가폰을 잡아 화제를 모은 ‘롤러코스터’와 ‘톱스타’도 각각 27만명, 17만명을 동원하는 데 그쳐 손익분기점도 넘기지 못했다.
안방극장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바람몰이를 기대했던 스타들도 스크린에서는 약발이 잘 듣지 않았다. 드라마 ‘굿닥터’의 주상욱이 양동근과 주연한 ‘응징자’는 20만명도 들지 못했다. 서인국·이종석 주연의 ‘노브레싱’도 청춘 영화로 기대가 높았지만 계절에 맞지 않는 수영 소재의 영화라는 약점 탓인지 관객 45만여명으로 주저앉았다. 그룹 빅뱅의 탑이 주연한 ‘동창생’은 수능 특수를 타고 가까스로 100만명의 문턱을 넘겼으나 남파간첩이라는 식상한 소재로 극장가의 주된 타깃층인 30~40대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아이돌 스타 이준이 주연한 ‘배우는 배우다’도 10만여명, 김선아 주연의 스릴러 영화 ‘더 파이브’도 인기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했지만 71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물론 극심한 가뭄 속에서 선전한 영화들도 있다. ‘친구2’는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한계에도 275만명을 동원했고, 여진구 주연의 스릴러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도 239만명을 모았다. 영화 ‘소원’은 아동 성폭행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뤘으면서도 270만여명의 관객들이 관람했다. 하지만 300만명의 선을 넘긴 흥행작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화 관계자들은 지난해부터 한국영화의 호황기가 이어지면서 영화판에 투자 자금이 몰리고 펀딩 규모가 늘어났지만, 안이한 우려먹기식 기획영화가 쏟아졌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기이던 2006년 영화 시장에 투자 자금이 대거 유입되면서 2007~2008년 질적 하락이 이어졌던 때를 떠올리는 이도 있다.
국내 대형 배급사의 마케팅팀장은 “최근 소형 벤처 창투사에도 자금이 몰리면서 인기 배우, 콘셉트, 장르 등 유행하는 요소 중 하나만 있으면 내용이 그다지 참신하지 않은 기획 영화에도 투자 자금이 몰렸다”면서 “모두 비수기에 홈런을 기대했지만 관객들의 한국 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쌓인 데다 영화를 보는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에 함량 미달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영화홍보사의 대표는 “올가을에 한 주에도 두세 편씩 한국영화가 쏟아진 것은 CJ, 롯데 등 대기업 배급사들이 자사 매출을 올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영화를 개봉시킨 것과도 관계가 있다”면서 “결과적으로 양적으로는 팽창했지만 질적으로는 하락했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하반기에 어디선가 본 듯한 소재나 분위기의 ‘카피캣’ 영화가 쏟아진 것이 호황기 끝에 찾아오는 전형적인 거품 현상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관객들이 유사성에 대해 더 예민해졌기 때문에 반복되는 카피캣 영화는 분명 적신호가 켜진 것이고 호황 끝에 거품이 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물론 큰 흥행은 아니더라도 손익분기점을 넘긴 ‘화이’나 ‘소원’ 같은 의미 있는 영화는 반갑지만 함량 미달의 영화들이 내년 초까지 계속 나온다면 한국 영화의 하락세는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12월 극장가는 내년 한국영화의 흥행세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말 흥행작이 연초까지 이어지며 해당 연도 흥행의 장기적인 향방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올해 연말에는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 로맨틱 코미디 ‘캐치미’, 전도연·고수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 공유 주연의 액션 영화 ‘용의자’ 등 총 4편의 한국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 영화 제작자는 “지난 2007년 극심한 불황을 한 차례 경험했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영화라면 몰라도 대작 영화에서까지 그러한 실패가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올가을에 유독 우울하고 센 영화들이 많아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가 적었던 만큼 연말에 흥행을 주도하는 대형 작품이 나와 다른 한국 영화에도 좋은 영향을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그래픽 강미란 기자 mrkang@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