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성폭력을 당하고 친구와 가족마저 잃은 소녀의 이름은 한없이 도도한 ‘공주’(천우희)다. 공주는 친구를 사귀고 기타를 치며 평범한 여고생의 일상을 살아가려 애쓴다. 영화 ‘한공주’가 성폭력을 소재로 한 다른 사회 고발성 영화와 다른 길을 걷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사건의 진행 과정이나 가해자 처벌보다도 영화가 초점을 둔 건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 공주가 마주한 세상이다.
모든 아픔을 뒤로한 채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공주는 교내 아카펠라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은희(정인선)를 만난다. 주변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에 문득 아픈 기억들이 떠오르지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 공주에게 여고생의 빛나는 나날이 펼쳐지는 듯하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그런 공주를 품어주지 못한다. 합의를 요구하는 어른들에게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되자 공주가 되묻는다. “사과를 받는데 왜 제가 도망 다녀야 하나요?”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를 고통 속에 신음하고 보호받는 존재가 아닌 삶의 주인공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다. 또다시 일어선 공주를 외면하는 사회를 에두르지 않고 보여준다. 공주의 현재와 과거가 촘촘하게 교차되면서 꾹꾹 눌러놓은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감독의 솜씨가 탁월하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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