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도시 파리, 사랑에 빠진 가난한 연극 단원,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여배우, 그리고 ‘질투’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까지, 한 편의 이야기가 금방 떠오를 것 같은 멋진 조합이다. 1960년대부터 활동해 온 프랑스의 대표적 시네아스트 필리프 가렐은 자신이 어렸을 적 경험했던 일들을 고혹한 흑백 영상으로 재현하면서 독보적인 우아함을 드러낸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찬란했던 연인들의 시간은 파편화돼 곳곳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반복되는 서정적 피아노 선율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감수성을 한껏 고조시킨다. 특히 장 루이 오버트의 음악은 ‘질투’라는 감정 이전에 놓인 사랑과 실연의 정서를 동시에 끌어올리는데,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공존하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사건은 놀랍게도 서로 많이 닮아 있다. 사랑의 고통, 실연의 아름다움이 독창적 형식 안에 아련하게 교차하는 작품이다.
‘루이’는 아내(클로틸드)와 딸(샤를로트)에게 이별을 고하고 ‘클로디아’와 동거를 시작한다. 좁고 초라한 루이의 집 안에서도 두 사람은 새로 시작한 여느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보듬고 장난을 치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사랑에 푹 빠져 별다른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루이와 달리 오랫동안 무대에 서지 못한 클로디아는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면서 점차 날카로워져 간다. 샤를로트가 엄마에게 던지는 대사처럼, 이들의 관계도 “누가 더 사랑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물론 ‘누가 더 많이’와 ‘누가 더 오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질문이다. 클로디아의 변심은 루이의 집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달라지는 데서 확실하게 표현된다. “여기 있을 때가 좋아”라고 말하던 그녀는 이제 “이 집에서 더는 못 살겠어. 더럽고 침울해”라며 훌쩍인다. 자존감이 낮아진 클로디아의 불만은 가난이라는 현실과 애인의 경제적 무능으로 향하고, 무명배우인 루이로서는 그녀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없다. 결국 클로디아는 순애보가 얹어진 낡은 집 대신 자신을 포장하고 안정시켜 줄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도 영원한 기쁨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 명백하지만, 영화는 이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클로틸드의 실연으로 시작해 루이의 실연으로 끝내는 구조가 사랑과 이별의 연쇄 작용을 보여 주는 데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완벽하게 절제된 이 영화가 홍조를 띠는 것은 샤를로트의 역할 덕분이다. 첫 장면에서 열쇠 구멍으로 부모님의 이별을 훔쳐본 그녀는 이후에도 계속 삼각관계-부모님과 클로디아-의 관찰자이자 매개로서 활약한다. 아빠의 애인과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엄마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보고하는 그녀의 천진함을 통해 어른들의 감정은 더욱 섬세하게 전달된다.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가 끝까지 고상함을 유지하는 이유는 인물들이 질투라는 감정을 타인에게 분출하지 않고 자신 안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자 바느질을 하는 루이의 아내처럼 고요하기도 하고, 과격한 방식을 택하는 루이처럼 다소 요란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도 경망스럽거나 천박하지 않다. 아름답고, 슬프고, 여운이 긴 작품이다. 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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