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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현실과 설레는 꿈 사이에 선 청년

‘러스트 앤 본’과 ‘예언자’ 등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널리 알려진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오래된 신작’이 도착했다. 그가 10여 년 전 만들어, 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영화음악상을 수상한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15일 개봉)이다. 이 영화는 제임스 토백 감독의 첫 연출작 ‘핑거스’(1978)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토백의 원작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정신 질환에 노출된 천재 피아니스트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 그에 비해 오디아르가 새롭게 만든 작품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아버지의 압박과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뒤늦게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청년의 이야기를 담아 낸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스물여덟 토마(로망 뒤리스)는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부동산 일, 해결사 노릇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옛 에이전트를 만나게 된다. 피아노를 잘 치던 토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에이전트. 그는 토마에게 피아노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권한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그는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다. 이후 토마는 중국 유학생(린당 팜)에게 피아노 레슨까지 받아 가며 연습에 몰두한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반전시킬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끊어졌던 피아노와의 인연을 이어 붙이려는 것은 모종의 우연이라기보다 토마의 의지다.

길을 가다 어머니의 옛 에이전트를 발견했을 때, 토마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를 향해 뛰어간다. 무슨 대화가 오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토마는 이미 거기에서 어떤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 그는 독립해 살지만 탐욕을 부리는 아버지(닐스 아르스트럽)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토마를 괴롭힌다. 여기에서 그가 찾아낸 출구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의 연결이다. 어머니와 겹치는 피아노 앞에 토마가 앉아 있는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순수한 박동에 몸을 맡긴 예술의 향연―어머니의 영역은 냉혹한 현실의 법칙―아버지의 권력이 침범하지 못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토마는 과연 자기 재능을 십분 발휘해 피아니스트로 성공할까. 삼류 감독이라면 그런 장밋빛 미래를 찍을 것이다. 그러나 오디아르는 일류 감독이다. 그는 손쉬운 인생의 낙관주의를 경계하고, 비정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직시한다. 그러는 한에서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토마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피아니스트가 못 되는 그의 실패가 아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토마가 어떻게 실패하게 되느냐, 실패한 뒤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이다. 그러니까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사무엘 베케트, ‘최악을 향하여’) 꿈꾸던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예전에 꿈꾸었던 나날과 앞으로 꿈꿀 날들마저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토마는 심장이 건너뛴 박동을, 심장으로 쿵쿵 뛰게 한다. 15세 관람가.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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