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 시온은 영화의 소재를 사회의 문제에서 구하는 감독이다. 그는 사회 문제의 발단을 가족에서 찾으며,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의 풍경을 통해 문제의 한 단면을 제시한다. ‘차가운 열대어’의 도입부가 한 예다. 부인은 인스턴트 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데운 다음 식탁에 내놓는다. 딸은 휴대전화에 열중하다 대뜸 자리를 뜬다. 가장은 묵묵히 밥만 먹을 뿐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한다. 소노가 식탁의 위기에 대해 논의를 제기하려고 이 장면을 삽입한 것은 아니다. 그냥 사실인즉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위엄을 상실한 가장, 가족생활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부인, 버릇없는 아이는 영화의 시작점이지 궁극적인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염려하기보다 차갑게 분노하는 쪽인 소노 시온의 영화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현실의 울타리를 허무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소노의 영화는 평범한 (혹은 그렇다고 착각하는) 인물이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게 한다.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소노는 ‘과연 그런 자격이 있는지’ 따진다. 그는 인물들이 막연하게 품은 환상을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 그들의 몸, 정신, 언어, 가치, 사랑, 가족 등을 가혹하게 질타한다. 좀 더 정확하고 역겹게 말해 난도질한다. 그러면서도 공격을 당하는 쪽이 역으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끼길 원한다. 산 시간만큼 죄를 지었다는 투인 소노의 영화는 폭력적이고 거칠고 끔찍하고 음란하다. 단순히 거기에 그쳤다면 그의 영화는 차별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소노는 인물이 심연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지 시험한다. 그의 공격으로부터 제외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인물의 이름이다. 인간임을 기억하게 해주는 순수한 기표를 되뇌며 인물은 어떤 인간으로 부활할지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다시 태어날 권리를 아무나 얻진 못한다. 소노는 기성세대가 이미 끝장난 세대라고 판단한다. 그들을 믿지 않으며 그들에게 어떤 희망도 품지 않는다. 소노의 영화에서 미래는 소녀의 몫이다. 폭력적이고 어리석고 철없는 소년 대신, 아픈 심장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을 아직 잘 모르는 소녀가 딛는 발걸음에 미래의 목숨을 건다. 그게 소노의 영화다. ‘차가운 열대어’의 소녀가 주변부에 머물면서도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그래서다. 항상 죽음을 이겨내는 소노의 소녀들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것은 극단적이고 혼란스러운 소노 영화의 미래를 점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질문이다. 빠른 속도로 많은 수의 작품을 쏟아내는 소노 시온이 일본 영화의 한 미래라는 것만 알 따름이다. 23일 개봉.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