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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왼쪽부터 릴리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아내의 응원이 없었다면 못했을 거다”

영화 ‘매트릭스’ 연출자로 잘 알려진 앤디 워쇼스키(50) 감독이 성(性)을 바꾸고, 릴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릴리는 8일(현지시간) 시카고의 LGBT신문 ‘윈디시티타임즈’를 통해 성전환수술 사실을 밝힌 뒤 자신이 왜 성전환수술을 결심했는지,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쓴 장문의 글을 공개했다.

일찌감치 릴리의 ‘언니’가 된 라나 워쇼스키(52) 또한 성전환 수술 후 여성의 삶을 살고 있다. 형제에서 남매, 이젠 자매감독이 된 셈이다. 릴리는 라나에 대해 “내 멋진 언니”라며 애정을 드러낸 뒤 “언니와 내 아내, 친구들의 사랑과 응원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트렌스젠더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충도 고백했다. 릴리는 “‘트랜스젠더’와 ‘전환’이라는 단어는 나로서는 힘들다”라면서 “대다수가 강요하는 젠더이분법 세계에 살면서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세상에서 여생을 살아야 하는 힘겨운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릴리는 “양분법은 잘못된 우상”이라고 지적한 뒤,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무한을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며, 계속해서 낙관주의자로 남아서, 진보를 위한 시즈프스의 투쟁에 내 어깨와 내 존재를 바치고, 다른 세상의 잠재력의 본보기가 되려 한다”고 밝혔다.

“그래, 나는 트랜스젠더다. 그래, 나는 성전환을 했다. 퀴어라 함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를 거부하고 다른 세상의 잠재력을 주장하는 것이다.”

- 다음은 릴리 워쇼스키의 글

“충격적 성전환- 워쇼스키 형제가 이제 자매가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이런 헤드라인을 기다려 왔다. 지금 이 순간까지 몹시 두려워하거나 어처구니 없다며 화를 내면서 기다렸다.

트랜스젠더가 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우리는 대다수가 강요하는 젠더이분법 세계에 살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세상에서 여생을 살아야 하는 힘겨운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의미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가족들의 도움을 받았고, 의사와 세라피스트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을 기회를 얻었다. 도움과 수단, 특권이 없는 트랜스젠더는 이런 사치를 누리지 못한다.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2015년에 트랜스젠더 살해 비율은 미국에서 역대 최고를 찍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숫자가 유색 인종 트랜스 여성이다. 이것은 기록된 사건들만이고, 트랜스들이 전부 살해 비율의 젠더이분법 통계에 깔끔하게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실제 수치는 더 높다는 뜻이다.

‘양들의 침묵’ 이후 먼 길을 왔지만, 우리는 지금도 매체에서 악마화되고 비난을 받는다. 우리를 공격하는 광고들은 우리를 잠재적인 포식자로 보고, 심지어 빌어먹을 화장실도 못 가게 하려 한다. 미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화장실 법은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고, 트랜스젠더들이 구타 혹은 살인을 당할 수 있는 화장실을 쓰게 만든다. 우리는 포식자가 아니고 먹이다.

그래, 나는 트랜스젠더다.

그래, 나는 성전환을 했다.

나는 친구들과 가족에에게는 커밍 아웃을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안다. 다들 아무렇지 않다. 내 멋진 언니 덕분에 그들은 한 번 해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환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아내와 친구들과 가족들의 사랑과 응원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랜스젠더’와 ‘전환’이라는 단어는 나로서는 힘들다. 두 단어 모두 주류에 흡수되며 복잡한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뉘앙스가 없다. 트랜스젠더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독단적인 두 종착점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리고 ‘전환’은 한 종착점에서 다른 종착점으로 순식간에 옮겨갔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나는 계속 전환을 해왔고 앞으로도 평생 계속 전환을 할 것이다. 0과 1 사이의 무한과도 같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무한을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양분법의 단순함 이상으로 대화를 끌어올려야 한다. 양분법은 잘못된 우상이다.

지금은 젠더 이론과 퀴어 이론은 내 자그마한 두뇌를 괴롭힌다. 이런 단어들의 조합은 내 귀에는 자유 형식 재즈처럼 연결이 안 되는 불협화음으로 들린다. 나는 퀴어와 젠더 이론을 이해하기를 갈망하지만,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힘들다. 내 사무실에는 내 좋은 친구가 준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의 명언이 있다. 나는 가끔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참 쳐다보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의 울림은 오래 남는다:

“퀴어라 함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를 거부하고 다른 세상의 잠재력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낙관주의자로 남아서, 진보를 위한 시즈프스의 투쟁에 내 어깨와 내 존재를 바치고, 다른 세상의 잠재력의 본보기가 되려 한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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