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채널의 거침없는 전진에 ‘거대 공룡’ 지상파 방송 3사가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던 편성 합의가 없던 일이 됐고, KBS가 십수 년 만에 금요드라마 시간을 부활하기로 했다.
또 마케팅부서가 제작국에 합쳐지는 등 오랜 기간 변함없이 같은 모습을 지키고 있던 지상파 방송사의 편성과 조직에 최근 눈에 띄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다매체 시대, 급변하는 방송 환경이 이들 공룡 3사의 기득권을 하나 둘 무너뜨리는 가운데, 특히 올해 드라마와 예능에서 연일 히트작을 내며 파죽지세로 치닫고 있는 tvN의 성장세가 방송 3사의 변화에 채찍을 가했고 여기에 JTBC, MBN 등 종편채널 예능프로그램의 약진도 힘을 보탰다.
◇ 평일 밤 11시 ‘75분 합의’ 없던 일로
KBS와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3사는 지난해 10월21일부터 평일 밤 11시대 프로그램에 대해 75분 편성을 실시했다. 광고를 포함해 방송 시작부터 끝까지 75분 내에 편성하기로 방송 3사 편성본부장이 각사를 대표해 합의한 것이다.
이 합의는 이후 지난 1년간 한차례도 깨지지 않고 지켜졌다. 아시안게임 등 특수한 경우는 예외로 했지만, 그외 평상시는 3사 모두 75분 방송을 지켰다.
하지만 지난 10월9일 KBS2 ‘해피투게더’가 서태지 편을 ‘특집’이라는 이유로 87분간 방송하면서 처음으로 깨진 3사의 합의는 이어 SBS ‘힐링캠프’가 지난 17일 홍은희 편을 80분 편성하면서 다시 깨졌다.
이 과정에서 KBS와 SBS는 서로 감정싸움을 하더니, 결국 3사는 지난 24일을 기점으로 평일 밤 11시 예능 75분 합의를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그러자 당장 SBS ‘룸메이트’ ‘즐거운 가’ ‘자기야’, KBS2 ‘우리동네 예체능’ ‘해피투게더’가 80분 전후의 편성을 했다.
방송 3사는 KBS와 SBS가 서로 합의를 깬 것도 있지만, 올해 들어 매체 환경이 더욱 변하면서 평일 밤 11시 예능을 75분으로 묶어두고는 케이블 채널과 경쟁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KBS 편성국 관계자는 “3사가 선의의 경쟁을 펼치자는 차원에서 75분 합의를 한 것이지만, 매체 환경이 바뀌면서 75분 구속이 타 매체와의 경쟁에 방해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3사 편성 관계자가 여러 차례 만나 회의를 했고 그 결과 각 프로그램의 개성에 맞게 방송 분량을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변화는 지상파 평일 밤 11시 예능이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져 있는 반면, 케이블채널 예능이 지상파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
강호동의 MBC ‘별바라기’, 이효리의 SBS ‘매직아이’ 등이 2~3%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조기 종영하고, MBC ‘헬로 이방인’이 27일 2.3%를 기록하는 등 지상파 예능이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고 있다. 그에 반해 MBN ‘최불암의 이야기 숲 어울림’이 4.284%, JTBC ‘비정상회담’이 3.999%를 기록하는 등 케이블채널 예능이 무시 못할 힘을 키운 것이다.
방송 3사는 평일 밤 10시 드라마와 주말 오후 예능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합의는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케이블의 위협으로 위태로운 상황이다.
SBS 편성국 관계자는 “이미 종편과 케이블채널에 시청자를 많이 뺏긴 상황이라 지상파의 고민이 깊어간다”고 밝혔다.
◇ KBS, 내년 1월 금요드라마 편성…”다양한 형식 실험”
KBS는 내년 1월 금요드라마를 편성하기로 했다. 현재 청소년 드라마 ‘하이스쿨 러브온’과 교양 ‘VJ특공대’가 방송되고 있는 오후 9~11시 시간대에 드라마를 탄력적으로 편성하기로 한 것이다.
기존 드라마가 67분 편성에 주당 2회 방송되는 형식이라면, 이 시간대에는 50분 분량의 드라마를 1~2편씩 편성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단막, 4~8부작, 16부작 등 다양한 형식의 드라마를 만들어 실험을 해보겠다는 게 KBS 드라마국의 포부다.
KBS의 이러한 결정에는 금요일 밤 시간을 장악한 tvN의 약진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금토 오후 8시30분에 방송되는 드라마 ‘미생’이 드라마적 인기를 뛰어넘어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고, 뒤이어 예능 ‘삼시세끼’도 매회 자체 시청률을 경신하는 현재의 구도가 지난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생’ 전에는 ‘연애 말고 결혼’이, ‘삼시세끼’ 전에는 ‘꽃보다’ 시리즈가 같은 시간에 편성돼 큰 재미를 봤다.
이들 프로그램이 현재 7~8%의 시청률까지 치솟자 KBS도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금요일 밤 드라마 존을 신설하기로 한 것이다.
문보현 KBS 드라마국장은 “지상파의 고민이 담긴 편성 전략으로 봐달라”고 밝혔다.
문 국장은 “지상파가 오랜 기간 편성의 틀에 변화를 꾀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위기를 맞아 다시 점검하는 시기인 것”이라며 “지난 20년 가까이 드라마는 일주일에 두 편씩 방송해야 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예능을 편성하는 틀에서 변화가 없었는데 이번에 다른 방식의 편성을 실험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 KBS 단막극장 폐지…제작국에 마케팅부 합치기도
KBS는 금요드라마 존의 편성으로 기존 일요일 밤 12시10분에 편성해온 단막극장 ‘드라마 스페셜’을 폐지한다. 당연히 돈의 논리다. 광고가 안 붙어 만들수록 손해만 보는 단막극 대신 광고 단가가 센 금요일에 경쟁력 있는 드라마를 배치해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이다.
KBS는 금요드라마 존에서 단막극도 1년에 15편 이상 방송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KBS PD협회가 ‘단막극의 실질적 폐지를 우려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는 등 일선 드라마 PD들의 반발은 거세다.
PD들은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양질의 콘텐츠 제작을 위한 기본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이 KBS 단막극의 존재 이유”라며 단막극이 많은 신인 작가와 배우를 배출해 온 성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이러한 단막극장의 운명은 지난 십수 년 반복돼왔다. 역시 수익 논리 탓으로, 방송사의 경영이 어려워지면 드라마국에서는 단막극장이 가장 먼저 철퇴를 맞았다. MBC와 SBS에서도 단막극장의 폐지와 부활이 잊힐만하면 반복됐는데, 이번에는 케이블의 득세로 또다시 불똥이 튄 것이다.
KBS 드라마국의 한 CP는 “후배들의 우려를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이기 때문에 모든 게 경쟁일 수밖에 없고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 방송 환경의 변화에 맞게 변화를 추구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이 같은 지상파의 위기 속에서 마케팅부서가 제작국에 합쳐지기도 했다. MBC는 최근 조직개편 때 드라마 마케팅부, 예능 마케팅부를 만들어 드라마국과 예능국 내에 마케팅부를 만들었다.
이는 프로그램을 단순히 잘 만든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잘 팔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과거 지상파는 잘 만들어 예고편만 몇 번 틀면 시청률을 보장받았다. 홍보가 절로 됐고 장사도 됐다. 하지만 다매체시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상파도 마케팅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됐다. 기존에도 방송 3사에서는 드라마·예능 제작 지원팀이 꾸려져 왔지만 소극적인 역할이었다면, MBC의 이번 조직 개편은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MBC 관계자는 “tvN 등 케이블에서는 처음부터 제작 못지않게 마케팅을 강조해왔다. 그만큼 방송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라며 “지상파도 변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