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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이 있다. 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진급을 위해 동료들을 모함하고 위기로 몰아넣는 데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변태적 도색(桃色)은 이미 정도를 넘어 동료의 아내들에게까지 뻗쳐 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쳐 놓았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거리낌 없이 짓밟아 버리는 남자, ‘필스’(Filth)의 주인공 브루스 로버트슨은 동시대 인간 말종의 초상과도 같다.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브루스는 이해 불가한 주인공이다. 좀 모자라거나 괴짜스럽더라도 착하고 정의로운, 그래서 금방 애정을 갖게 되는 경찰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분명 아름답고 훈훈한 휴머니즘적 결말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끌고 있는 긴장감은 여느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르다. 그것은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과연 이토록 사악한 브루스에게도 용서와 구원이 존재할 것인가? 그것은 영화적 장치 속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갖는가?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고만고만한 영유아기의 인성을 비정상의 궤도로 밀쳐내는 것은 환경과 정신적 외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대의 통념이다. 그런 기준에서 어린 동생을 죽음으로 몰았던 브루스의 경험은 그의 현재를 단단히 뒷받침한다. 브루스가 직접 고백하듯이 그는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 약과 섹스에 탐닉하고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를 확인한다. 승진을 위한 권모술수 역시 아내와 딸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책감으로 인한 정신 분열은 점점 더 빈번하게 브루스를 옥죄어 오는데, 그의 환각 속에 등장하는 능글맞은 정신과 의사가 동생을 많이 사랑하던 아버지였음이 밝혀질 때쯤 브루스에 대한 인간적 연민도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윽고 가해지는 브루스에 대한 처벌들, 범죄자들에게 끌려가 린치를 당하고, 승진에 실패하며,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린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가혹한 것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배경으로 범죄와 추잡한 성행위를 보여주던 이 영화의 비정함은 결말부에서 극대화된다. 광기로 이글대던 브루스의 눈에서 이번에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도 그에게 용서나 구원은 허락되지 않는다. 감독은 한 줄기 희망이었던 메리(성모를 의미하는 이름)와의 접속조차 빠르게 차단해 버린다. 이 세상에서 반복되는 게임의 룰이 언제나 그렇기 때문일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과분하다고 생각해도 자의로 멈출 수 없는 불운의 인생사 말이다. 이처럼 ‘필스’는 단순히 타락한 경찰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한 인간의 씁쓸한 운명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편 ‘트레인스포팅’(대니 보일, 1996년)의 원작자 어빈 웰시의 존재감과 라디오 헤드의 ‘크립’(creep)이 요즘 대세인 1990년대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영화의 냉소와 묘한 마찰을 일으킨다.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좋고, 드물게도 관람 후의 여운이 훨씬 진한 작품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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