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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리얼리티로 빚은 담백한 로맨틱 코미디

지난해 4월 전주영화제에서 인터뷰한 재중 동포 장률 감독에게 차기작으로 경주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의아함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망종’, ‘경계’ 등에서 소외된 경계인들의 목소리를 현실적으로 그려 온 그와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를 연결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때 장 감독은 “알고 보면 나도 좀 재미있는 사람”이라면서 겸연쩍게 웃었다.

영화 ‘경주’에서 신민아(왼쪽)와 박해일은 소소한 일상 속 사소한 감정에서 소중한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잔잔하지만 특별한 경험을 하는 두 남녀를 연기한다.<br>인벤트스톤 제공
그의 말처럼 12일 개봉한 ‘경주’는 장 감독의 장기인 리얼리즘 화법에 소소한 유머를 더한 ‘장률식’ 로맨틱 코미디다. 화려하고 톡톡 튀는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사색적이고 여백이 많은 예술영화로 그만의 향기를 풍긴다. 언뜻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감독은 천년 고도인 경주를 영화의 소재이자 배경으로 선택했다. “어느 곳에서도 능을 보지 않고는 살기 힘들다”는 대사가 나올 정도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 경주. 친한 형의 부고를 듣고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베이징대 교수인 최현(박해일)은 7년 전 고인과 함께 경주의 한 찻집에서 봤던 춘화를 떠올리고 경주행을 결심한다. 옛 연인 여정(윤진서)에게 경주에 와 달라고 부탁한 뒤 찻집 아리솔을 다시 찾은 최현은 당시 춘화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정 역시 그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인다. 허탈한 마음을 안은 최현의 발길은 다시 아리솔로 향하고 그곳에서 찻집 주인 공윤희(신민아)와 재차 마주한다. 처음에 뜬금없이 춘화를 찾는 그를 변태로 취급했던 윤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닫혔던 마음을 연다.

이야기는 감독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됐다. 1995년 경주로 여행을 왔던 장 감독은 경주의 전통 찻집 아리솔에 그려진 춘화를 보고 다시 그곳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십장생 화가’로 유명한 김호연 동국대 미술학부 교수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김 교수는 영화를 위해 ‘경주’라는 제목의 그림을 새로 그렸다.

감독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의 이미지를 두 남녀 주인공을 통해 전달한다. 충동적으로 찾은 경주에서 윤희에게 신비로움을 느끼는 최현, 죽은 전남편과 닮은 최현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윤희. 두 사람의 만남은 달달한 로맨스는 아니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는 계기가 된다.

롱테이크와 느릿한 호흡은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고 지식인 캐릭터인 최현의 엉뚱한 행동, 그에 따른 지식인에 대한 풍자 등 순간순간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가 극의 윤활유가 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볼만하다. 나른한 지식인을 표현한 박해일은 극 중 캐릭터에 제대로 몰입했다. 지금껏 들뜨고 불안한 연기로 기억됐던 신민아도 많이 정돈되고 안정됐다는 평가들이다. 영화 ‘베를린’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이 엉뚱한 매력의 플로리스트로 등장해 웃음을 선사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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