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 가진 그녀

167㎝의 키에 팔은 가늘고 길다. 쌍꺼풀 없는 눈은 웃을 때마다 초승달처럼 휘었다. 기름한 콧날 밑에 자리잡은 콧망울은 도톰하고 곱살스럽다. 활짝 웃거나 신나게 말할 때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입술 사이로 잇몸이 살짝 내비친다. 귓볼에는 귀걸이 없이 자국만 남아 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그 단아함을 드러내는 게 마치 조선의 백자와 같다. 20대의 풋풋함과 당당함이 함께 느껴진다. 아름답지 않은 배우는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얼굴로 개성과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배우는 흔하지 않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찻집에서 만난 배우 김고은(24)은 스크린에 비치던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얼굴이 아름답다기보다는 개성이 넘치고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게 대중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직접 얼굴을 마주한 김고은은 달랐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건만 그는 말갛고 매력적인 얼굴로 낙천적인 에너지를 쉼 없이 뿜어냈다.

단 세 편의 영화로 영화계를 사로잡은 배우 김고은은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에 출연하는 것은 어쩌면 운명인 것 같다. 이윤정 감독님이 이전에 연출한 ‘커피프린스 1호점’은 모두 열 차례나 돌려 봤을 정도로 내 인생의 드라마였고, 감독님과 꼭 함께 일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br>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다양한 캐릭터 감정 표현의 귀재…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다

그는 2012년 영화 ‘은교’에서 노시인을 존경하면서 노시인이 쏟아붓는 정염의 대상이 됐던 여고생을 연기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 뒤 ‘몬스터’ ‘차이나타운’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연기력의 한계를 시험하듯 동생을 죽인 악마에게 복수해야 하는 저능아, 사생아로 태어나 길러준 엄마를 죽여야 하는 숙명을 지닌 뒷골목 부랑아 등 강렬한 역할만을 맡아 왔다. 지난 13일 개봉한 ‘협녀, 칼의 기억’은 물론 개봉을 앞두고 있는 ‘성난 변호사’ ‘계춘할망’에서도 한결같다. ‘협녀’에서 맡은 홍이 역할도 고난도의 무협 액션을 거의 대역 없이 소화했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감당하기 힘든, 마음속 깊은 상처를 다스려야 하는 감성의 파고를 드러내는 연기가 더욱 돋보였다. 영화계에서 그에게 ‘괴물 신인’이라는 호칭을 붙여 준 이유에 대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가 처음부터 연기력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데뷔 4년차 배우인 그에게도 술회할 수 있는 연기의 출발 지점이 있었다.

“계원예고 연극영화과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대사가 너무 많아 부담스러웠고, 심장이 아플 정도로 너무 쿵쾅거렸어요. 그때 ‘아, 내가 연기를 계속하면 심장마비에 걸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고등학교 때 처음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저 영화가 좋아서 관련 일을 하면 재미있으려니 하고 시작했지만 우연히 출연한 첫 연극에서부터 덜컥 주연을 맡았다. 큰 부담을 느껴 더이상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당시 연극반 연출을 맡은 선생님의 “한 작품만 더 해 보자”라는 제안에 못 이겨 무대에 다시 올랐다. 김고은은 “중간에 대충대충 연기를 하는 모습에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잘못 본 것 같다’는 질타도 들었다”면서 “나중에 연극 ‘우리 읍내’를 무대에 올렸을 때는 아주 즐겁고 행복했고, 무대에 불이 모두 꺼졌는데도 내려가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직관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인물 속으로 들어가려 노력하죠”

일관되게 보여준 폭넓은 연기 대역과 깊이 있는 캐릭터는 꼼꼼한 분석과 연구를 배경 삼았을 것 같지만 의외로 그는 직관적이다.

그는 “시나리오가 들어올 때 맡은 역할의 호불호를 보기보다는 이야기에 동의되고 좋으면 하는 편”이라면서 “캐릭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보다 그냥 많이 생각하면서 인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협녀’ 촬영을 하면서도 “홍이는 몇 차례에 걸쳐 감정의 데미지가 많았던 만큼 그 무게감을 잘 표현하되 후반부에서 받을 더 큰 상처와 차별화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논리적 사고는 노력의 형태로 드러나고, 직관적 사고는 재능의 형태로 확인된다. 김고은은 타고난 재능이 확연히 더 두드러지는 배우다. 그의 성장 과정은 이러한 짐작을 더욱 부추긴다.

김고은은 “4살 때부터 10년 동안 중국에서 살며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를 다니다 한국에 왔는데 중국에서 말도 타고 자연과 함께 지냈던 것과 달리 학교 끝나고서도 학원에 다니며 공부해야 하고 시험 때 한두 개 틀렸다고 펑펑 우는 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학교 상황에 숨이 턱 막혔다”면서 “오랜 시간 고민하고 관련 정보를 찾아본 뒤 부모님에게 예고를 가겠다고 말씀드려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얘기하는 말끝에도 잇몸을 슬쩍 드러내며 너털웃음을 붙이곤 한다. 힘든 일은 비교적 잘 잊고 즐거운 기억은 오래 간직한다. 전형적인 낙관주의자의 모습이다. 낙천적인 성격인 데다 마음속 그늘이 없으니 그동안 함께했던 김혜수, 전도연, 이병헌 등 대선배들 앞에서도 그다지 주눅 들지 않는다.

“칸의 여왕, 할리우드 스타 등 저와는 먼 것 같은 느낌은 처음 ‘협녀’ 미팅할 때만 잠깐 들었고 그다음부터는 그냥 편하고 재미있게 지냈죠. 하하하. ”

●“좋은 선배들 만난 건 행운… 가장 닮고 싶은 배우는 전도연”

김고은은 가장 닮고 싶은 배우로 전도연을 꼽았다. 그는 “직접 만나기 전에는 배우로서 존경심이 컸고 그분의 출연 작품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는데 함께 만나 촬영하면서는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면서 “특별한 배우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알게 해 줬다”고 그 이유를 들었다.

“전도연 선배님뿐 아니라 다른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한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었죠.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고, 같이 하기에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김고은은 현재 휴학생 신분이다. 201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한 뒤 아직 졸업하지 못했다. 그는 “‘차이나타운’ ‘성난 변호사’ 촬영 당시는 학교에 다니던 때였는데 죽을 뻔했다”면서 “이수해야 할 전공과목이 많고 다 힘든 과목들이어서 학업은 작품 활동을 안 할 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력은 해야겠지만 졸업할 가망이 없다”는 푸념을 덧붙였다.

‘협녀’는 크랭크업 이후 2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린 뒤 어렵게 개봉한 작품이다. 필모그래피의 두께가 아직 두껍지 않은 젊은 배우에게는 그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김고은은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로 봤을 때는 후반부 작업이 길어져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한다”면서 “틈만 나면 후시녹음 등의 작업에 참여했고, 그 과정이 많이 도움 됐다”고 의젓하게 말했다.

이제 고작 그가 나온 영화 네 편을 봤을 뿐이다. 올해 개봉할 ‘성난 변호사’에서 날 선 검사로 변신하고, 촬영을 마친 ‘계춘할망’에서는 상처를 간직한 여고생으로 따뜻한 감성을 펼쳐 보인다. 또한 처음으로 드라마를 찍어 이제 스크린이 아닌 TV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내년 1월부터 ‘치즈 인 더 트랩’에서 자신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을 대학생 역할을 맡는다.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김고은의 또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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