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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 전국투어·라이브 DVD 발매…“목소리 다할 때까지 팬들 찾아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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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0주년 콘서트 앞둔 이승철
30주년 기념 콘서트 앞둔 이승철
이승철, ’데뷔 30주년 맞았어요’
“9살짜리 둘째 딸이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30년이면 1만일이 넘는다더라고요. 1만일이 넘어가니 인제야 노래가 뭔지, 사람 관계가 뭔지 알겠어요.”





1986년 밴드 부활 1집으로 데뷔한지 30년이 된 이승철(50)은 강산이 세 번 바뀌고서야 노래가 뭔지 좀 알겠다고 했다.

26일 오후 1시30분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남더힐 내 더줌아트센터에서 연 데뷔 30주년 기자회견에서다.

그는 “내가 서른을 갓 넘은 나이였던 1994년 미국 뉴욕에서 ‘색깔 속의 비밀’을 녹음했다”며 “그때 함께 작업한 세계적인 프로듀서 닐 도르프스만이 50세였는데 ‘음악은 50세부터 제대로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올해 딱 50세다. 비로소 공연을 준비하며 노래를 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노력할 것이고 지금부터 시작이란 생각이 든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래를 좀 알겠다는 의미에 대해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이라고 설명했다.

“그간은 음악을 들려주기 급급했고 성적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고 무대에서는 만감이 교차했어요. 하지만 이제 무대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노래하게 되고 무대에서 행복하다는 걸 느끼죠. 마음도 편안해졌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30년간 현장에서 뛰며 한국 가요계의 풍경이 달라지는 걸 몸소 체득했다.

그는 “내가 LP로 데뷔해서 CD와 디지털 음원 시대를 거쳤다”며 “또 우리 때는 노래하나만 잘해도 빅스타가 됐지만, 지금은 여러 조건을 갖춘 멀티테이너, 글로벌 스타를 원해 굉장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우리 때는 음반에 건전가요를 실어야 했고, 영어로 노래를 못해 개사했죠.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가 길면 데뷔를 못 했고요. 격변을 거쳐 이제 세계 최고의 K팝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30년간 음악 하는 자체가 영광스럽죠. 전 행운아란 생각이 듭니다.”

그는 데뷔 때를 또렷이 기억하며 “언더그라운드 생활을 하다가 부활과 만나서 함께 자취방에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희야’를 만들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기억에 남는 추억 세 가지로는 공연 포스터를 직접 붙이고 악기를 나르던 부활이 첫 공연을 했을 때를 가장 먼저 꼽았다. 두 번째로는 1989년 솔로로 데뷔해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로 첫 날개를 펼쳤을 때, 세 번째로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라고 했다.

음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태생적인 딴따라여서 음악을 하고 싶지 않았던 적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어떤 일이 생겨 손가락질을 받았을 때 연예인으로 생활하기 어렵더라”며 “공인으로 책임감 있는 생활을 하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음악이 나를 지탱해줬다”고 덧붙였다.

향후 30년에 이뤄내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다할 때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팬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팬들을 찾아가는 콘서트”라며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전 세계 팬들을 찾아가면서 소극장, 대극장 가리지 않고 공연하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30주년을 기념한 행보도 전국 방방곡곡의 팬들을 찾아가는 전국투어 ‘무궁화 삼천리 모두 모여랏’이다. 또 지난 7월 1~2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연 ‘이승철 30주년 기념 콘서트-무궁화 삼천리’를 10월 7일 84분짜리 라이브 DVD로 발매한다.

1년에 30회 이상 공연해 ‘라이브의 황제’, ‘보컬 신’으로 불리는 그는 그간 공연에서 밴드, 댄서, 음향 엔지니어 등 ‘크루’의 팀워크에 가장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가수가 공연장에서 노래 잘하는 건 기본입니다. 전 매년 타이틀을 바꿔 상반기 3개월, 하반기 3개월,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는데 25년 이상 함께 한 공연 크루가 제힘이죠. 조명이나 영상 하나까지 어긋나지 않는 완벽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완성도가 높아지니까요.”

목소리를 지켜온 비결도 공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연간 6개월 동안 1주일에 한 번 공연하는 게 컨디션 비결”이라며 “2주만 쉬어도 감각이 떨어지는데 1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공연하는 자체가 소리 유지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는 지문과 같아 바꿀 수 없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여러 작곡가의 곡을 통해 패션처럼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고 비유했다.

“기존 작곡가의 세련된 곡도 부르고 신인 작곡가의 풋풋한 음악도 만났죠. 제 팬층이 10대부터 70대까지여서 불특정 다수를 만족시키기 힘들어 팬들의 기호에 맞추기보다 제 느낌에 따라가는 음악을 했죠. 아이돌 스타일의 음악이 유행한다고 제가 불러 잘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는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를 짓고 교도소 재소자, 대안학교 학생, 탈북청년 등의 합창단도 지휘하며 사회 활동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음악의 힘을 이야기했다.

그는 “합창단을 지휘하며 백마디 말보다 한마디 노래가 힘이 더 크다는 걸 느꼈다”며 “재소자 아이들이 처음에는 섬뜩한 눈빛이었는데 몇개월이 지나니 선한 눈빛으로 바뀌더라. 노래로 희망의 길을 찾아 지금은 바리스타, 운전기사가 된 친구도 있고 결혼해 찾아온 친구도 있다. 음악의 힘은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에서 30년을 유지한 버팀목도 팬이라고 즉답했다.

“정말 유치한 대답인데 팬이죠. 팬이 중심에 있어야 활동할 수 있어요. 제가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건 결국 팬들이 저를 지탱해줬기 때문입니다. 10대이던 팬들은 이제 40대가 됐는데 공연장에 자녀와 함께 오는 걸 바라볼 때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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