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말코비치, 콜린 퍼스, 라이언 필립, 배용준 등 연기 좀 한다는 배우들이 맡았던 역이다. 캐릭터를 설정하는 과정에선 일부러 다른 버전을 보지 않았다. 장동건은 “처음에는 어둡고 마성이 있는 인물로 생각했는데, 감독님은 유쾌함과 유머를 불어넣기를 원했다. 덕분에 차별성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또한 “중국 제작보고회 때 알게 됐는데 장궈룽(張國榮)이 생전에 간절히 원했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묘한 부담이 생겼다.”고도 했다.
감독과 촬영·편집·음악 등 주요 스태프는 한국인이지만 중국 자본에 의해, 중국 배우들과 중국에서 찍었다. ‘무극’으로 중국영화를 경험했지만, 당시 대사가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대사 부담이 컸을 터. 장동건은 “감독님이 크랭크인까지 시간이 촉박하니 한국어로 대사하고 나중에 더빙해도 된다.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중국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로 연기하는 게 비일비재하다. 홍콩 출신들이 쓰는 광둥어는 어차피 외국어나 다름없어서 생겨난 현상이다. 량차오웨이(梁朝偉)가 대표적이다.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그의 매력적인 중저음은 만다린어 성우의 목소리다. 장동건이 한국말로 얘기하면, 장쯔이는 만다린어로 대꾸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루 이틀 중국어를 외워서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반면 한국어로 해봤더니 영 어색했다. 그래서 밤을 새워서라도 중국어 대사를 외웠다. 어떻게 다 외웠는지…. 잠깐 ‘그분’이 왔다 가신 거 같다(웃음).”
‘위험한 관계’에 이어 ‘신사의 품격’에서는 어깨의 힘을 쫙 뺀 채 오글거리는 로맨틱 코미디 연기까지 했다. “(두 작품) 이전까지 슬럼프였다. 하고 싶은 작품과 해야만 하는 작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하는 일이 많았다. 대중들이 원하는 게 반듯하고 착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도 그 이미지를 깨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짐이 되고 날 옭아매더라.” 그는 이어 “‘신사의 품격’이나 ‘위험한 관계’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새로운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설렘이 다시 생겼다. 뭐든 새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되찾았다.”며 웃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그의 인터뷰를 보면 ‘미남 배우’에 대한 거부감이 짙게 묻어난다. 불혹이 된 지금은 어떨까. “젊었을 때 치기일 수도 있는데 대중이나 언론에서 외모만을 주목하는 게 힘들었다. 일부러 잘생기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찾아다녔다. 어쩌면 그런 고민이 날 성장하게 해 준 것도 같다. 지금은 외려 반대다. 좀 더 외모가 좋을 때, 싱싱할 때 (‘신사의 품격’, ‘위험한 관계’ 같은 작품을) 왜 안 했을까란 아쉬움도 있다. 물론 어릴 때 했다면 지금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하진 못했을 것 같다. 하하하.”
글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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