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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로 끝난 SBS ‘끝없는 사랑’서 파란만장한 서인애 열연”자만할 때쯤 실패, 그것 또한 감사…죽을 때까지 배워야”

화끈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순간 돌직구가 들어왔다.

”제가 끌고 가야하는 드라마인데, 제가 주인공인데, 제대로 못 끌고 간 것 인정해요. 반성합니다.”

역대 한국 드라마 최고 등급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주인공을 맡아 무려 37부를 끌고 온 배우의 입에서 이런 첫마디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한방 먹었다.

이런 경우 으레 “힘들었다”는 서두로 시작되기 마련인 인터뷰가 난데없이 ‘자아 비판’의 자리가 됐다. 드라마의 실패와 부족함에 대해 ‘지적질’ 좀 하려고 했더니 주인공이 ‘선방’을 날리고 들어온 것이다.

간만에 청량감이 들었다. 이래서 이 배우는 앞으로를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이제 만 스물아홉. 어떤 실패도 피와 살이 된다.

지난 26일 SBS TV 주말극 ‘끝없는 사랑’을 끝낸 황정음을 29일 광화문에서 만났다.

”항상 고생하면서 촬영했는데 솔직히 이번 드라마는 별로 고생을 많이 안했어요. 몸이 편했어요. 그래서 반성해요. 그렇게 연기하면 안되잖아요. 고민은 많았죠. 도중에 이런저런 불만도 폭발했고, 여러가지로 마음에 안 드니까 화도 많이 냈고요. 작품이 좋을 때는 잠 한숨 못자도 힘이 나고 연기도 잘 되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저도 사람인지라 남 탓도 하게 되고 남의 잘못만 눈에 들어오고는 합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주인공인 제 탓이라고 생각해요. 반성하려고요.”

’끝없는 사랑’은 서인애라는 한 여인의 스펙터클한 인생을 그린 드라마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부산 출신 고아가 소년원을 거쳐 법대에 입학하고 여배우로 데뷔했다가 인권변호사를 거쳐 종내는 법무장관 자리에까지 오르는 과정을 좇은 드라마다.

이런 한줄짜리 설명만 봐도 말이 안되는 구석이 많아 보이는데, 역시나 드라마는 서인애의 인생을 그리면서 상당부문 개연성을 놓쳤고 초반 반짝 관심을 끌었던 드라마는 중반 이후 작품성과 시청률 모두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 드라마와 꼬박 동고동락을 해온 주인공으로서는 속상한 것도 많고 변명할 것도 많아 보이는데 황정음은 ‘닥치고’ 스스로를 비판했고, “이 드라마 역시 내게는 하나의 경험이 됐다. 역시 경험은 중요한 것 같다.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 아니겠나”라고 쿨하게 말했다.

서인애 역은 캐스팅 과정에서 황정음에게 가장 먼저 들어왔었다. 하지만 ‘자이언트’ ‘비밀’ 등 강도 높은 드라마를 소화했던 그로서는 이번에는 좀 ‘패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여배우 누구도 이 묵직한 역할을 못 맡겠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제작진은 다시 황정음에게 매달렸다.

”서인애의 인생사가 말이 되네, 안되네까지는 안 봤어요. 그냥 어려운 역할이라고만 생각했죠. 근데 바로 그래서 하고 싶었어요. 더구나 남들이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래? 내가 하지 뭐’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지금 이 나이 여배우 중 누가 이 역할을 하겠어’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내가 해서 스펙트럼을 또 한번 넓혀야겠다고 덤볐죠.”

’자이언트’ ‘내 마음이 들리니’ ‘골든타임’ ‘돈의 화신’ ‘비밀’까지 쭉 상승곡선을 화려하게 그리며 달려온 황정음은 그 자신감처럼 ‘끝없는 사랑’에서도 실제로 열연을 펼쳤다. 엄청나게 굴곡진 서인애 인생의 마디마디 고통과 분노와 회환을 결코 부족하지 않게 표현했다. 주인공답게 해냈다.

하지만 허술한 스토리가 그의 연기를 받쳐주지 못하면서, 배우들끼리의 앙상블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것을 느끼면서 어느새 배우로서의 욕심을 놓아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황정음 스스로 이날 ‘고백’한 것이다.

”저는 아직 한참 더 배워야하는데 이번 드라마에서는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는 게 가장 아쉬웠어요. 편하지 않으려고 도전했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들어갔는데 촬영장에서 칭찬만 들으니 어느 순간 편하게 연기하고 있더라고요. 훨씬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했어야했는데 그게 환경 탓이든 아니든 어쨌든 제가 그냥 몸이 편한 쪽으로 타협하며 연기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이 찜찜해요.”

황정음은 “다 끝난 지금은 이번 드라마를 만난 것도 감사하다. 죽을 때까지 연기를 배워야하는데 이번 드라마를 통해 교만하지 말라고 하늘이 다시 한번 날 채찍질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듯 지금은 모든 드라마 대본이 황정음을 거쳐가고 그가 자신의 연기를 돌아보며 뼈저린 반성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황정음의 현재 모습은 격세지감이다.

2002년 아이돌그룹 슈가로 데뷔했을 때는 그야말로 앞뒤 없는 철부지였고, 2007년부터 드라마 ‘사랑하는 사람아’ ‘겨울새’ ‘리틀맘 스캔들’ 등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연기에 뛰어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용기로 연기를 하겠다고 할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연기력을 선보였던 그다.

”그때 저 어땠어요? 무뇌아였죠?(웃음)”라며 깔깔 웃은 그는 “내가 생각해도 여기까지 참 잘 온 것 같고 운도 좋았다. 모든 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연기력은 물론이고, 연기에 대한 생각도 제대로 박히지 않았던 황정음은 그러나 2009년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을 만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철이 들었고 연기자로서 도약했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보여준 연기는 앞으로 다시는 못해요. 일생에 한번 쏟아부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그때 다 쏟아부어서 연기했어요. 초심의 힘도 있었고 어리기도 했고요. 칭찬을 받는 맛이 어떤 건지 알았고 연기의 재미를 알아가던 때였죠. 그 모든 것이 시너지가 돼 나온 연기였기 때문에 다시는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에 근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저는 앞으로 계속 노력해야하는 거죠. 연기에 대한 열정과 갈망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너무 고민을 심하게 해서 괴롭고 고통스럽기도 해요. 대선배들도 촬영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을 보면 이 직업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너무 괴로운 직업이라고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서 무섭고요.”

황정음은 “바로 그런 무서움과 두려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끝없는 사랑’은 하면서 별로 무섭지 않았기에 반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분간은 휴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방전시킨 후 리셋을 할 계획인 그는 “결국은 계속 부딪히며 경험하고 성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며 “이제 진짜 시작이다”고 다부지게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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