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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에는 이런 설명이 붙는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속이려는 목적이 없었거나, 바닥을 친 절박함 때문이었다.

날 때부터 못되거나 비뚤어진 캐릭터도 아니었다. ‘악발이’·’또순이’라는 소리를 들은 정직한 노력파였고 ‘바보’·’천사’라 불리던 깨끗한 순정파였다.

적어도 드라마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나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와는 출발선상이 다르다.

하지만 ‘또순이’도, ‘천사’도 일순간 부조리한 행동으로 태생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누명’이 씌워지는 위기에 봉착했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누명’이냐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강하다. 정상참작이 있을지언정 잘못된 생각과 행동은 실제로 저질러진 일이고, 그것이 단 한 번의 잘못이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주인공의 인생 전체가 매도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안방극장에는 거짓말로 파국을 맞게 되거나 파국의 위기를 맞은 두 여자가 관심이다.

KBS 2TV 주말극 ‘내 딸 서영이’의 이서영(이보영 분)과 SBS TV 주말극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문근영)이다.

둘은 캐릭터도,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각기 치 떨리는 지독한 가난과 발버둥쳐봐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이라는 비슷한 동기로 ‘거짓말’을 했다는 점은 같다.

두 드라마는 이서영과 한세경의 거짓말에 따른 파장이 어떻게 펼쳐지고 그 끝은 어디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동력 삼아 전개되고 있다.

먼저 거짓말이 탄로 난 쪽은 이서영이다. ‘내 딸 서영이’의 지난 13일 방송에서 이서영이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와 가까이 사는 남동생의 존재를 부정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의 행복한 결혼생활 3년은 와장창 깨졌다.

이서영은 뭔가 변명이라도 하라는, 일단 시부모께 무조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라는 남편 우재(이상윤)의 눈물 어린 부탁을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단칼에 자르면서 짐을 싸들고 집을 나온다. 자존심 때문에 또 한번 거짓으로 위악을 떨었다.

그는 3년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똑소리 나는 며느리였고, 없이 자랐지만 올바르고 근면 성실하게 자라난 품성이 반듯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시부모는 서영의 거짓말을 알고 “네가 감히 어떻게!”라며 진노했고, 서영이 그간 쌓은 모든 것은 일순 물거품이 됐다. 동시에 그는 ‘거짓말쟁이’ ‘패륜아’로 급전직하했다.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던 서영은 3년 전 우재의 부모 앞에서 나이트클럽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아버지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서영은 바로 그 거짓말로 이제 인생 전체가 ‘매도’당하게 됐다. 진실을 고백할 시간이 3년이나 있었지만 서영은 차마 고백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의 부메랑을 맞아 ‘세상 앞에 발가벗겨진 치욕’을 느끼며 집을 나오게 됐다.

다음 차례는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이다. 지난 13일 드라마는 한세경의 거짓이 탄로 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끝이 났다.

그가 돈을 목적으로,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청담동 부자들에게 작심하고 접근했다는 점, 차승조(박시후) 회장의 정체를 그가 고백하기 전에 한발 앞서 알았음에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모른 척 연기한 점 등이 그의 ‘죄목’이다.

한세경은 해외파들이 득실대는 패션계에서 토종 국내파지만 불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국내에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스펙을 갖추는 등 서민 가정의 딸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가진 것 없는 남자를 수년간 일편단심 물심양면으로 사랑해준 순정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비정규직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현실’을 뼛속 깊이 절감한 그는 ‘청담동 며느리’가 되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운다.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그는 회장의 비서인 줄 안 차승조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청담동 며느리’ 목표를 다시 되새기며 눈물로 차승조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이별 통보 직후 알고 봤더니 차승조가 비서가 아니라 회장 그 자신이었단다. 차승조는 한세경의 ‘티 없는 순수함’에 반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프러포즈까지 했다.

한세경은 ‘고백’을 하라는 주위의 ‘협박’에 “가난하고 못된 여자는 절대 고백 안 해요”라고 대차게 대꾸하며 ‘거짓말’을 끝까지 밀어붙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가난한 여자가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타려고 애쓰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항변하며 자존심을 세운다.

20여 년 실제로 ‘티 없는 순수함’으로 산 한세경은 차승조를 신분과 상관없이 사랑한 것이 진심이었지만 한번 시작한 거짓말로 이제 그 진심은 설 자리를 잃고 ‘꽃뱀’으로 몰릴 위기에 처했다.

한세경은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은 ‘소용없는 변명’이 됐다.

이서영과 한세경 모두 가난 때문에 거짓말을 했고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이들을 ‘악녀’라고 손가락질하지는 않는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 둘의 캐릭터를 ‘공감간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실적’이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시청자가 보기에는 두 캐릭터의 행동에 대한 배경설명이 그만큼 충실히 이뤄졌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용서와 이해의 몫은 당장 시청자가 아닌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있다.

자신들이 한 짓으로 ‘거짓말쟁이’가 된 이서영과 한세경이 ‘복권’할 수 있을지, 한다면 어떤 식으로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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