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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범죄가 피해자 개인은 물론 다음 세대의 삶까지 얼마나 처절하게 짓밟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영화 ‘나쁜 피’. 영화는 한국 사회 도처에 만연한 성폭력 실태와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때론 격앙된 어조로 때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편한 마음으로 감상할 소재의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과 스릴러물을 방불케 하는 극적 긴장감으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영화의 얼개는 복잡하지 않다. 교환 학생 자격으로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주인공 인선(윤주)은 어머니가 강간을 당해 자신이 태어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생물학적 아버지인 방준(임대일)을 찾아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어렴풋하게 기대했던 아버지의 존재가 강간범이라는 충격은 한 엘리트 여대생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자신의 존재와 핏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인선은 생부 전처의 친척 동생으로 위장해 그와의 위험한 동거를 시작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한순간도 인선을 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털어놓는 엄마. 그런 엄마에게 이유 없이 미움을 받고 급기야 자신의 피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딸. 영화는 대를 이어 계속 되는 성폭행 피해자들의 시각에서 극을 이끌어 가며 그들의 절규에 주목한다.

이 영화의 의미는 아동 성폭행을 비롯해 부녀자 납치·강간 등 점차 흉악해져 가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종을 울리는 데 있다. 영화는 초반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잘못된 욕망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성들을 보여 주면서 성범죄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을 꼬집는다.

특히 “누가 당하라고 했어?”, “본능에 충실한 것뿐, 남자라서 다 이해하지 않습니까?” 등 등장 인물들의 대사는 성범죄에 대한 처벌에 관대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중간 부분의 호흡이 길어지면서 다소 늘어지는 측면이 있지만, 마지막의 충격적인 반전은 긴 여운을 남긴다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다는 강효진 감독은 “인간이라는 고귀한 존재가 사랑으로도, 끔찍한 범죄로도 탄생할 수 있다는 엄청난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데뷔작에서 충격적이고 복잡한 캐릭터를 맡아 강도 높은 수위의 노출과 파격 연기를 감행한 윤주의 당찬 연기가 눈길을 끈다. 11월 1일 개봉.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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