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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하이틴 드라마 ‘학교2’로 처음 얼굴을 알릴 때만 하더라도 처진 눈매와 덧니가 귀여웠던 탤런트 김민주가 이름(이승민·31)을 바꾼 후 이토록 지독하게 연기에 매달릴 줄은 솔직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2년 전 영화 ‘비스티 보이즈’를 시작으로 지난해 MBC 드라마 ‘탐나는 도다’를 거쳐 촬영이 끝난 지 2년여 만에 오는 18일 지각 개봉되는 ‘무법자’까지. 그의 최근 출연작들을 보고 있으면 연기에서 한과 독기가 느껴진다. 이 중 ‘무법자’에서는 집단 성폭행의 후유증을 간신히 이겨낼 때쯤 살해당하는 비운의 여성으로 출연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놓는 열연을 펼쳤다. 지난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와 ‘무법자’ 시사회에서 이승민은 “영혼까지 짓밟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성격마저 밝아졌다”고 털어놨다. 보기보다 당차고 무섭다.



◇난 연기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촬영 시작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수십 명의 스태프 앞에서 홀로 맨살을 드러낸 채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칼에 수십 차례 찔려 죽는 장면을 연기하기가 절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머리와 몸이 따로 놀까 봐 솔직히 겁도 났다.

출연 결심을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알렸다. 내심 어머니가 ‘출연을 말려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어머니는 “네가 배우라면 대중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는 용기가 있어야지”라며 자칫 나약해질 뻔한 딸을 독려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심이 흔들릴까 봐 그 길로 출연을 수락하고 촬영장에 갔다. 하필이면 촬영 첫날부터 화장실에서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살해당하는 장면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20시간 가까이 찍었다. 나중에는 연출자인 김철한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에게 “어서 빨리 죽여달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애원했다.

감정선을 유지해야 했다. 촬영 전날이면 검은 커튼을 친 숙소 방에 온종일 틀어박혀 바깥출입을 삼갔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죽어간 희생자를 떠올리면 경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끝나고 몸과 마음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진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다. 주위 사람들도 “표정이 밝아졌다”며 저마다 한 마디씩 건넸다. 희한한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제 마음속 오랜 상처가 촬영을 통해 치유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마치 공포영화를 보고 난 뒤의 후련함이라고나 할까요. 전작 ‘비스티 보이즈’에서는 화류계 마담을. 이번에는 성폭행 피해자를 차례로 연기했어요. 이제는 어떤 캐릭터가 와도 자신있답니다. 하하하.”

◇착한 얼굴에 착한 캐릭터는 어울리지 않아

이승민은 유순하게 생긴 자신의 얼굴에 불만이 많다.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2000년대 초 트레이드 마크였던 덧니를 빼고 2년 가까이 공백 기간을 가진 적도 있다. “착하게 생긴 얼굴에 착한 캐릭터까지 연기하면 얼마나 밋밋해 보이겠어요. 착한 캐릭터를 싫어하는 이유죠.”

마스크의 한계를 벗어나겠다고 다짐했을 무렵. ‘비스티~’의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 부유한 집안이 몰락해 호스트로 전락한 주인공 ‘승우’(윤계상)의 누나이자 고급술집 마담인 ‘한별’ 역이었다. 오디션이 끝나고 제작진은 “당신 말고 실은 우리가 염두에 둔 여배우가 있다. 만약 그 여배우가 출연을 거절하면 당신을 기용하겠다”고 귀띔했다.

배역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1순위인 여배우가 ‘어디 몸이라도 아팠으면’ 하는 생각까지 품었고. 결국 ‘한별’ 역에 캐스팅됐다. 출연이 확정되고 실제 밤의 세계가 궁금해. 주위 사람들을 졸라 수차례 룸살롱을 견학했다. 그곳에서 같은 여자의 몸으로(?) 종업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탁자 위에 술병과 술잔을 놓는 방법부터 특유의 과일을 깎는 기술까지 모두 익혔다.

유지태 김하늘과 출연한 ‘동감’에 이어 두 번째 영화인 ‘비스티~’는 큰 선물을 안겼다. 비록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하정우 윤계상 윤진서 등 함께 출연한 동료 배우들과 어울리면서 영화인의 공동체 의식을 피부로 접하게 됐다.

◇언제라도 이 사람이라면 결혼해야겠다

그는 19세 연상인 송병준 그룹에이트 대표와 지난 1월 결혼했다. 10년 전 드라마 ‘여비서’로 만나 처음 인연을 맺고 본격적으로 교제한 지 2년여 만에 사랑의 결실을 이뤘다. 영화·드라마 음악 작곡가와 연기자로도 유명한 송 대표는 드라마 ‘환상의 커플’ ‘꽃보다 남자’ 등 여러 히트작을 제작했다. 지금은 ‘버디 버디’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탐나는 도다’에서 제작자와 조연으로 호흡을 맞췄다. 둘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제작자를 등에 업은 혜택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런 얘기를 가끔 듣기는 해요. 이제 사모님이 됐으니 앞으로 출연은 걱정없겠다고요. 그러나 송 대표님과 저를 잘 모르는 분들의 착각입니다. ‘탐나는 도다’ 때 여러 번 오디션을 치러 마지막 후보까지 올랐고. 송 대표님은 괜한 오해를 살까 봐 끝까지 저의 출연을 반대했어요. 그래도 연출자가 저를 고집하자 할 수 없이 캐스팅을 허락했어요. 솔직히 화도 나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색안경을 낀 일부의 시선에도 송 대표를 남편이기에 앞서 소울메이트라고 부른다. 세대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여러 구석에서 생각이 비슷해서다. 그래서였을까. 원래 독신주의자였지만. 송 대표의 청혼에 ‘이 사람이라면 결혼해야겠다’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연기도. 사랑도 뜻한 대로 우직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승민이다.

조성준기자 whe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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