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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시청자수준 못 쫓아와” vs. “시청률 올리려는 의도”

“끼 부리지 말아요. 나랑 잘거 아니면.”

올여름 인기를 끈 SBS ‘신사의 품격’에서 김도진(장동건 분)이 서이수(김하늘)에게 한 말이다.

”연애 말고 잠만 자자.”

tvN ‘로맨스가 필요해 2012’ 속 대사다. 이 드라마는 30대 여성 간 성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다뤘고 ‘욕실 샤워 키스’ 등 지상파에서는 보기 힘든 ‘19금 장면’도 보여줬다.

TV가 성(性)에 대해 솔직해졌다.

이를 두고 TV가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시각과 채널 무한 경쟁 시대에 오로지 시청률을 올리려는 제작진의 얄팍한 의도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또한 민감한 소재를 흥미위주로만 다루거나 핑크빛으로 포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정성이 결여된 왜곡된 묘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tvN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012’
◇TV, 금기를 들여다보다 = 올해 방송가에 불고 있는 ‘19금(禁. 19세미만 시청관람불가)’ 열풍은 비단 드라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상반기 ‘19금 성인 개그’로 인기를 모으더니 아예 정규 편성을 꿰찬 tvN 생방송 코미디 프로그램 ‘SNL 코리아’가 대표적.

고정 출연자로 합류한 신동엽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낯부끄러운 대사를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MBC ‘세바퀴’는 지난 15일 방송인 이경애가 결혼을 주제로 “김지선은 결혼이 필수 조건이 아니라 XX가 필수조건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내보내 논란을 빚었다.

방송에서는 ‘XX’가 무음 처리됐지만 맥락상 충분히 성관계가 연상됐기 때문이다.

성적 소수자나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도 잇따라 시청자를 찾았다.

tvN ‘응답하라 1997’의 강준희(인피니트 호야)는 윤윤제(서인국)에 대한 연정을 숨기지 않고, SBS ‘아름다운 그대에게’의 차은결(이현우)은 구재희(에프엑스 설리)를 남자라고 착각하면서도 그에게 끌린다.

비록 일부 시청자의 거센 반발로 방송이 보류됐지만 KBS조이는 국내 최초로 트랜스젠더 토크쇼 ‘XY그녀’를 선보이기도 했다.

성적소수자임을 드러낸(커밍아웃) 연예인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방송인 홍석천은 최근 SBS ‘강심장’에 출연해 “입양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림감이 되고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됐다”고 성적 소수자 아버지로서의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2000년 그가 동성애자임을 밝혀 방송가에서 퇴출당한 때와는 격세지감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방송이 시청자 수준 쫓아오지 못했던 것” = TV가 성이나 동성애 등의 소재들을 꺼내기 시작한 데에는 우리 사회의 변화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게 방송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SNL 코리아’의 안상휘 tvN CP는 “일반 시청자들은 웹툰이라든지 여러 매체를 통해 ‘19금’에 대해 이미 충분하게 수준이 올라와 있다”며 “방송이 쫓아오지 못했던 것”이라고 짚었다.

’XY그녀’를 맡은 임용현 KBS조이 CP도 “최근 홍석천이 ‘강심장’에 나와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야기할 정도로 요즘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조심스러운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럽다면 오히려 그들을 어떻게 묘사할지 방법론으로써 조심스러운 것”이라며 “성적소수자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때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들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시선도 과거보단 한층 너그러워졌다.

한 지상파 심의실 관계자는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심의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심의가 창작의 영역까지 억압하거나 강제를 한다면, 많은 창작물의 자유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의견을 전했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19금’ 소재를 다룬 드라마의 등장에 대해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한국 드라마가 계몽적인 편향성에서 벗어나 다양해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며 “예술에서 소재나 표현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청률 올리려는 의도”..왜곡된 묘사도 숙제 =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오로지 시청률을 올리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채널 무한경쟁 시대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는 “’19금’이나 동성애 코드는 문화 저변의 흐름이 바뀐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성적 문제들의 변화와는 별 상관없이 이뤄지는 시청률 제고를 위한 현상으로 보인다”며 “어떤 의미있는 변화라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진정성이 결여된 왜곡된 묘사도 숙제다.

금기를 깬 것은 분명 진일보한 측면이 있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TV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거나 고민하는 현실적인 모습보다는 ‘눈길끌기’ 위주의 다소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97’이 성시원(에이핑크 정은지)의 ‘속도위반 결혼’을 달콤한 사랑의 해피엔딩으로 포장하고, ‘SNL 코리아’의 성인 개그는 같은 프로그램의 ‘위크엔드 업데이트’ 코너가 뼈있는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초적인 쾌감을 선사하고 마는 게 그런 예다.

동성애 코드나 성적 소수자를 다룬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응답하라 1997’에서 윤윤제를 향한 강준희의 사랑에는 만일 현실 상황이었다면 준희가 느꼈을 고통이나 한계가 대폭 생략돼있고, ‘XY그녀’에 출연한 트랜스젠더들은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서지 못한 게 사실이다.

’아름다운 그대에게’의 차은결-구재희도 동성애자의 사랑을 진지하게 다룬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와 확연히 비교된다.

최근 일부 시청자들의 반발로 ‘XY그녀’가 방송이 보류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소재를 불편해하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임용현 CP는 “방송계가 일반 대중에 비해 개방적이라 우리가 쉽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나 한다”며 “어쨌거나 이런 식의 반발이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리언 사무국장도 “동성애자도 이성애를 다룬 작품을 보면서 자라지만 이성애자가 되지는 않는다”며 “그런데 일부 단체에서는 성적소수자를 다룬 작품이 동성애를 유발한다고 비판한다”고 꼬집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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